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중근 의사 유묵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[[안중근]]이 [[이토 히로부미]]를 사살한 후 [[뤼순]] 감옥에서 남긴 [[한문]] 휘호이다. 총 200점 이상으로 추정되며 [[안중근 의사 기념관]]측은 57점을 인정하고 있다. 안중근은 시대 상황상 모든 유묵을 [[일본인]]에게 남겼으며 이중 26점이 [[대한민국]]에 반환 또는 인도되어 [[대한민국의 보물|보물]] 569호 '''안중근 의사 유묵'''으로 지정 되었다. 이 중 1점(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: 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)는 본래 [[청와대]]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, 분실된 상태이다.[* 정황상 10·26 사태 이후 [[박근혜]]에게 인도되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나, 그 이후 왜 분실된 것인지는 오리무중이다.] 그 외에 1점(日韓交宜善作紹介: 일한교의선작소개[* 일본과 한국의 친선은 양국이 서로를 잘 알게 되는 것에 있다는 뜻. 취조, 재판 등에 입회해 통역을 맡았던 소노키 스에키에게 처형 전달인 2월에 써 준 것. 안중근 의사가 일본을 증오한 게 아니라 동양평화와 한일우호를 염원했다는 증거인 귀중한 유묵이다. 소노키 스에키는 이 유묵을 소중히 간직했으며, 이를 한국에 기증한 사람도 이 통역관의 후손이다.])은 [[한국인]] [[학자]]가 만든 [[일본]] [[도쿄]]에 있는 국제한국연구원에 일본인이 기증하였는데 [[http://www.seoul.co.kr/news/newsView.php?id=20120116002006|연구원 측에서 관리를 잘못하여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된다.]] 안중근은 매 휘호마다 '''[[한국인|大韓國人]] [[안중근|安重根]]'''이라는 서명과 함께 무명지 한마디가 잘린 자신의 왼손바닥에 먹물을 묻혀 찍어 낙관을 대신하였다. 안중근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글씨마다 그의 힘과 기개를 느낄 수 있는 엄청난 명필인데다, 옥중에서 자주 글씨를 쓰기는 하였지만 그 기간이 너무 짧아 유묵의 수가 한정되어 있는 점,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유묵의 내용과 글씨를 쓰던 당시 상황까지 겹쳐[* 유묵 같은 필기류의 유물은 필체도 필체지만 그 글씨를 쓴 사람의 행적에 따라서 가치가 크게 달라진다. 예컨대 안중근의 유묵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지만, 역시 명필로 알려진 친일파 이완용의 유묵은 거의 무가치로 평가받는다.] 그의 유묵은 근현대 명사들의 휘호 중 최고의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되며, TV쇼 진품명품에서 '''“안중근의 유묵은 값을 매겨 평가할 수 없다”'''(priceless)는 판정[* 보험가로 6억을 내긴 했지만, 실제로 한 말을 들어보면 가격 책정을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다.]을 하기까지 했다. 문단의 순서는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문화재 순서대로, 해외에 있어서 문화재가 아닌 것은 기타 문단에 넣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